신라 명필이 창건한 사찰,
충주 김생사지
명필 김생의 글씨처럼 역사에 남은 사찰 터
충주시 금가면의 한 사찰터가 '와당밭'이라고 불릴 정도로 수많은 기와 조각을 품고 있습니다. 이곳이 바로 김생사지인데, 신라의 명필 김생이 만년에 창건한 사찰이에요. 711년에 태어나 791년 80세까지 붓잡기를 멈추지 않았던 그 유명한 김생이 마지막 여생을 보냈던 곳이 바로 이 절입니다.
명필 김생의 생애와 사찰 창건
김생은 성덕왕 10년인 711년에 가난하고 미천한 가문에서 태어났어요. 하지만 어려서부터 글씨에 능했고, 원성왕 7년인 791년까지 80년의 인생 내내 붓을 놓지 않았습니다. 당대는 물론 후대에도 가장 뛰어난 명필로 칭해지는 그 김생이 만년에 창건한 이 사찰은, 그의 예술적 완성도가 고스란히 녹아 있는 공간이었을 것 같습니다.
김생사지는 주변에 장대석이 많고 석탑재와 기와 조각, 도자기 조각이 산재해 있어서, 과거의 영광을 짐작해볼 수 있는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요.
김생사지에서 출토되는 와전류가 워낙 많아서 사람들이 이곳을 '와당밭'이라고 부를 정도였습니다. 와당은 기와의 상단 장식 부분인데, 수많은 와당이 출토된다는 것은 이 사찰이 매우 큰 규모였음을 말해줍니다. 《수산집》의 '김생사중수기'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따르면, 김생사는 북진애, 즉 '예성'이라는 곳의 북쪽 나루에서 두타행을 닦은 곳이었어요.
두타행은 부처님의 정신을 따르는 수행 방식 중 하나로, 김생은 예술 활동뿐만 아니라 깊은 정신적 수행도 병행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시대별 흔적과 역사적 의미
사지의 역사는 신라시대에 시작되지만, 고려시대에 크게 번창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요. 수년 전까지 있었던 고와가라는 건물의 용마루에서 '건륭을미(1775년)'라는 망와와 '성상오십일년을미 충청도 충주'라는 암기와가 발견되었으니, 조선시대에도 이 일대가 의미 있는 공간으로 관리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1979년 당시에도 두 채의 건물이 ㄷ자 형태로 남아 있었다고 하니, 오랜 세월 동안 여러 번 재건되며 존속해온 역사 깊은 터인 거예요.
사지의 서쪽 강가에는 김생이 직접 쌓았다고 전해지는 김생제방이 있어요. 강물에 의한 침식을 방지하고 사찰 주변을 평탄하게 하기 위해 자연석으로 쌓은 이 제방은 40~50cm의 길이에 3~4m의 높이로 대규모였습니다. 하지만 현재는 충주댐 건설로 물에 잠겨 자취를 찾기 힘들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찰터는 신라 명필의 정신이 담긴, 한국 미술사와 종교사를 함께 증거하는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남아 있습니다.
명필 김생의 정신이 서려 있는 이 터에서, 천 년 세월을 거친 역사의 무게를 느껴봅니다. 글씨처럼 우아하게 남겨진 그의 자취를 따라가 봅니다.




